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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원무역

  •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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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貿易 foreign trade)

요약



한 나라의 기업이나 개인이 외국의 기업이나 개인과 하는 상품거래. 무역을 통하여 국내에서 생산된 재화는 외국에도 판매(수출)되고 외국에서 재화가 구입(수입)되어 국내에서 소비되는 국제분업이 형성된다. 〔무역이 이루어지는 근거〕 무역은 기본적으로 각국간에 재화의 상대적 가격이나 생산비에 차가 있을 경우에 이루어진다.


설명



한 나라의 기업이나 개인이 외국의 기업이나 개인과 하는 상품거래. 무역을 통하여 국내에서 생산된 재화는 외국에도 판매(수출)되고 외국에서 재화가 구입(수입)되어 국내에서 소비되는 국제분업이 형성된다.

무역이 이루어지는 근거
무역은 기본적으로 각국간에 재화의 상대적 가격이나 생산비에 차가 있을 경우에 이루어진다. 국내기업에서 구매하기보다 외국기업에서 구매하는 편이 운임이나 보험료 등의 경비를 부담하여도 싸므로, 상품을 수입하는 것이다. 무역을 하는 근거를 국제간의 상대적 생산비의 차이라는 면에서 밝힌 이론이 비교생산비의 이론, 또는 비교우위의 이론이다. 나라에 따라서 비교생산비차(비교우위차)가 나타나는 배경에는, 각국의 기후·지하자원 등의 자연조건이 다르고, 나라마다 그 나라에 적합한 생산물이 다르며, 경제발전단계나 사회상황이 다르고, 자본축적 정도나 노동의 질적수준에 차이가 있으며, 국제간의 기술수준이 다르다는 등의 요인이 있다. 나라마다 유리하게(싸게) 생산되는 산업을 전문화(특화)하여 그 생산물을 교환함으로써, 주어진 일정한 자원으로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생산물을 입수할 수 있는 분업의 이익(무역이익)이 발생하며, 국제적 차원에서 자원의 효율적 이용(자원의 적정배분)이 가능하게 된다.

무역과 경제발전
무역은 생산물 판로의 확대와 기업이나 산업의 생산규모의 확대에 의한 규모의 경제(대규모생산의 이익)를 실현하며, 경제를 발전시키는 요인이 된다. 기술고도화와 더불어 생산의 최적규모가 커짐에 따라서 일국내의 시장만으로는 좁아서 규모의 경제를 누릴 수 없을 경우에, 무역에 의한 시장확장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제 2 차세계대전 후의 유럽공동체(EC) 형성 목적의 하나는 대시장화(大市場化)에 의한 규모의 경제 실현에 있었고, 역내(域內)의 경제나 무역의 발전은 그러한 규모의 경제에 힘입은 바가 크다. 무역이 시장확장을 통하여 한 나라의 산업을 발전시킨다는 효과는 최초로 국제시장에 진출한 나라의 산업생산성을 높이고, 그것이 한층 더 수출을 증대시키는 형태로 누적적 산업발전을 촉진시키지만, 발전이 뒤진 후진국 산업에는 선진국산업과 국제경쟁을 통해서 발전을 추진하여야 한다는 불리함이 따르므로 자유무역은 후진국의 산업 발전을 저해하게 될 것이다.

무역과 국민경제
한 나라 수출·수입규모는 국민 소득수준, 외국환시세, 교통수단의 발달 등에 의존한다. 국민소득의 순환에서 수출은 일국의 국민소득 흐름에 밖으로부터의 수요 주입으로 국내생산과 국민소득을 증가시키는 승수효과(乘數效果)가 있고, 수입은 국내에서 창출된 소득이 외국 재화에 대한 수요로 말미암아 누출되는 것을 뜻하므로 국내생산을 감소시키는 마이너스의 승수효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실업이나 불황에 시달리는 나라는 수출을 촉진하고 수입을 삭감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이를 완화할수 있다. 하지만 일국의 수출은 상대국의 수입이므로, 무역이 한 나라 국민소득에 미치는 이러한 효과는 상대국에는 역효과가 되므로, 교역국 상호간에 이해(利害)가 대립된다. 또한 무역은 당사국에 생산특화나 규모경제상의 무역이익을 가져오는 반면, 국제분업의 상호의존관계에 의해 경제순환이 국내만으로는 완결되지 않고 국민경제를 세계경제의 그물(규모) 속에 포함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국민경제는 그만큼 국외경제 변동의 영향을 쉽사리 받게 되고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강해져, 무역이 중단되었을 때의 위험은 커지게 된다. 무역이 국민경제에 미치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효과와 나라마다 처해 있는 상황이 얽혀 각국의 무역 실태나 무역정책에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무역의 역사


자본주의 성립기 이전
무역의 역사는 오래되며, 이미 기원전에 페니키아인은 이집트나 동지중해에서 무역하였고, 그리스시대와 로마시대에는 지중해 연안 무역에다 동방과의 교역으로 범위를 넓혀, 비단길을 통해 중국과 무역한 것은 유명하다. 이 시대의 교역품은 노예·귀금속·보석·고급직물 등 당시 상류층의 사치품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무역은 상품생산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로마제국 붕괴 후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한때 무역이 쇠퇴하였다가 십자군원정을 계기로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북부 도시가 무역으로 번영하여 지중해의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유럽 북부에서도 한자동맹의 여러 도시를 중심으로 무역이 번영하였다. 중세의 교역지역은 더욱 확대되었고 대중화한 상품(향신료 같은 것)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상층계급의 사치품 위주였다. 15세기말 지리상의 발견과 상업혁명은 무역을 크게 변화시켰다. 무역의 무대도 지중해와 발트해에서 아메리카대륙(신대륙)과 아시아에까지 확대되었으며, 지리상의 발견에서 주역이 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새 시장에 약진하였다. 포르투갈은 동방에서 향신료, 에스파냐는 신대륙에서 금·은·담배 등을 수입하고 모직물을 수출하였다. 모직물수출로 유럽은 모직물공업이 성행하였는데, 그 중심은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무역의 확대는 자본주의적 공업생산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자본주의 성립기 이후
18∼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무역에도 변혁을 일으켰다. 산업혁명으로 면공업이 기계화되었고, 면직물이 저렴하게 대량생산됨으로써 일반대중의 생활자료로서 널리 보급되고, 수공업적 모직물에 대신하여 면직물이 영국의 수출무역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전세계 수출의 1/4∼1/3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할 만큼 신장하였다. 영국 수출품은 완제품이 많았고 수입품은 면화 등 원료와 식량이었다. 그리하여 가공무역이라는 근대적 무역으로 이행하여 영국을 <세계의 공장>, 그 밖의 각국을 원료·식량의 공급지로 한 국제분업체제가 확립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영국의 곡물조례 폐지를 계기로 하여 영국을 중심으로 자유무역의 기운이 높아져서 무역확장에 공헌하였다. 세계무역 발전에 기여한 단 하나의 요인은 국제금본위제의 확립이었다. 금본위제를 일찍 수립한 영국에 이어서 19세기 후반에는 대다수의 국가가 금본위제로 이행하여, 각국 통화간의 교환성과 교환비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함으로써 무역결제를 쉽게 하고 통화면에서 통상을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영국은 무역뿐만 아니라 해운업에서 우위를 차지하였으며, 국제금융면에서도 런던이 세계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1870년대 초까지 영국은 세계무역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고 있었으나, 70년대의 불황기를 전후하여 무역의 세계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독일과 미국의 공업발전, 특히 철강업의 발전과 더불어 그 제조공업품 수출이 증대하여 영국의 왕좌가 흔들리게 되자, 자유무역의 기운이 역전하여 다시 고율관세 (高率關稅) 부과로 국내산업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해외에 대한 덤핑이 성행하였다. 영국은 이 시기에 자본수출을 확대하였다. 제 1 차세계대전 후 무역세계의 현저한 특징은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의 후퇴와 미국의 약진이다. 미국은 유럽국가들이 전쟁으로 경제력을 소모하던 시기에 생산력을 증진시켜, 전후 수출에서는 영국을 앞질러 제 1 위가 되었다. 또한 캐나다와 일본이 새로운 공업국으로 무역무대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1917년의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로 탈바꿈하여 자본주의 세계시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세계무역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금본위제는 제 1 차세계대전으로 일시 중단되었으나 20년대 중엽부터 각국은 잇따라 금본위제로 복귀하였다. 무역과 국제금융의 중심지였던 런던과 더불어 새로이 뉴욕이 국제금융시장에 등장하였다. 전쟁으로 한때 쇠퇴한 국제무역은 20년대 후반에 크게 발전하였으나 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적 대불황으로 미국·독일 등지에서 공업생산이 반감하고, 실업이 급증하여 대폭 축소되었다. 국제무역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자유무역에서 크게 후퇴하였다. 20년대에 부활된 금본위제는 31년 영국의 금본위제의 정지를 계기로 다시 붕괴되어 국제결제기구는 동요하였다. 각국은 해외경제 변동에 의하여 초래되는 경제나 통화의 혼란을 차단하고 자국경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국가주의적 정책으로 무역과 국제자본이동에 제한을 가하게 되었다. 무역에 대한 규제는 고전적 관세뿐만 아니라 수입할당제·외환관리·구상무역 등 보다 더 직접적 정책 수단을 취하게 되었다. 무역규제에 따라 다각적 세계무역은 축소되었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분열된 세계경제를 재편성하고 자유무역을 촉진할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 국제통화기금(IMF)과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1995년에 WTO로 확대개편됨)이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IMF·GATT체제의 기본이념은 원칙적으로 자유무역을 추진하는 데 있었지만, 전쟁 후에도 한때 많은 나라에서 수입제한을 하였다. 미국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가 전쟁 후의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긴급한 수입이 필요하였으나, 그것을 충당할 수출이 되지 않아서 달러 부족현상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에 유럽이나 일본에서 부흥이 진척되고 1950년대 중반에는 달러 부족도 해소되어 무역도 자유화되었다.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에 걸쳐 세계무역은 IMF·GATT체제하에서 급속히 증대하였는데,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20년간의 세계무역액은 5배로 확대되었다. 세계무역의 증가율은 세계의 소득증가율보다 높아서 각국 경제의 상호의존관계는 깊어졌다. 이러한 무역발전에서 나타난 하나의 특성은 선진공업국과 개발도상국간의 무역, 즉 수직무역(垂直貿易)이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선진공업국 상호간의 수평무역이 상대적으로 확대한 점이었다. 60년대 중엽에 세계수출의 약 3/4은 선진공업국에 의하여 점유되었는데, 그것은 선진공업국의 수출성장률에 비하여 개발도상국의 수출성장률이 낮았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무역구조 변화와 관련해서 남북문제가 부각되었다. 세계무역 동향에 영향을 준 또 하나의 문제는 지역경제통합의 출현이며, 그 전형적 예인 EEC(유럽경제공동체)의 성공은 60년대 각 지역의 지역경제통합화 움직임의 계기가 되었다. 60년대 세계무역에서 특기할 세번째의 문제는 미국의 상대적 지위하락과 그에 따른 달러에 대한 신인(信認) 저하이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신인 저하는 달러위기를 부르고, 국제유동성 문제를 발생시켰다. 달러를 지탱하고 IMF체제를 유지하려는 각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달러위기는 결국 71년 여름에 달러와 금의 교환성 정지를 가져왔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20여 년 간 세계무역의 발전을 떠받쳐 온 IMF체제가 붕괴되었다. 70년대에 접어들자 세계무역은 양상이 바뀌었다. 71년의 스미스소니언 합의는 1년 남짓 만에 무너지고, 주요 국가들은 73년 변동환율시세제로 이행하였다. 더욱이 2번에 걸친 석유위기는 세계경제와 무역을 뒤흔들어놓아 방향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에 의한 석유가격의 대폭인상은 석유소비국의 국제수지적자와 경제성장의 둔화를 가져와서 스태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이미 70년대 초에 일본이나 유럽 국가들 추격에 의한 세계경제의 동질화와 이에 따른 산업구조의 조정은 보호주의적 기운과 무역마찰을 빚어냈지만, 석유위기로 인한 성장률 둔화와 국제수지 적자는 그러한 경향을 더욱 짙게하였고, 석유위기로의 대응과정에서 보였던 각국의 적응력의 차이는 무역마찰과 보호주의를 더욱 더 촉진시켰다.

한국의 무역


무역사의 개요
한민족의 대외교역 활동이 《진서(晉書)》 《삼국지(三國志)》 등 중국의 옛 문헌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금속문화의 유입으로 생산력 수준이 두드러지게 높아진 부족연맹체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즉 기원 전후기부터 부여와 고구려 및 삼한 등의 부족연맹체는 그들의 잉여생산물 혹은 특산물 등을 연맹체 상호간 또는 주변의 이민족과 빈번하게 교역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한민족의 본격적 대외무역의 기원은 부족연맹체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민족의 역사는 전통사회, 개화기, 민족항일기, 광복 이후의 시기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원시사회로부터 조선왕조 말기까지를 전통사회라 한다면, 이때의 대외무역은 주로 국가간의 국신물(國信物) 교환형태, 즉 국가관리의 공무역(公貿易)이 지배적이었다. 강대국이던 중국과는 조공형식의 공무역이, 약소국과는 국가간의 평화적 교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입공(入貢) 형식의 공무역이 이루어졌다. 사무역(私貿易)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으나, 관허형식 또는 관의 묵인하에 이루어졌다. 즉 사절단 일행에게 반칙적으로 허용되던 사무역을 비롯하여 국경지대의 호시무역(互市貿易) 및 왜관무역, 통일신라시대의 장보고(張保皐)에 의한 청해진무역 등이 그 예이다. 개화기에는 열강과의 개국통상조약으로 근대적 무역관계가 형성되었으나, 여러 가지 여건의 미성숙으로 조계지(祖界地) 무역이라는 왜곡된 형태의 근대무역이 전개되었다. 한국의 대외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외국상인들은 주로 선진국 제품의 중개무역에 종사하였으므로, 개화기의 무역은 중개무역 형태의 조계지무역이었다. 민족항일기에는 국권의 상실로 일본의 공산품과 한국의 공업원료·식량 등이 일본 상인에 의하여 독점적으로 교환되는 전형적 식민지 무역관계가 형성되었다. 광복 후에는 국권의 회복과 더불어 민족상인에 의한 자유로운 상사무역(商社貿易)이 전개되었으나, 1960년대 이전 과도기에는 무역규모도 보잘것없었고, 전형적 남북무역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60년대 이후 고도성장기에는 수출제일주의·수출주도형공업화정책의 추진 등으로 한국의 대외무역은 가공무역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현대무역의 전개와 과제
① 과도기(1945∼61):무역정책의 추이를 보면, 미군정당국은 1946년 무역면허제, 47년 구상무역제도를 채택하였다. 정부수립으로부터 6·25 때에는 수출촉진책의 일환으로 특혜외환제도, 52년 구상무역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수출입 링크제 등도 실시하였다. 휴전협정 이후인 54년에는 수출장려보상금제도, 55년에는 유명무실해진 수출입허가제와 수입쿼터제를 폐지하였다. 57년 말에는 최초의 무역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 시기의 무역동향을 보면, 46년부터는 부분적으로 민간무역이 재개되었으나, 밀무역이 성행하여 국민경제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정부수립으로부터 6·25중에는 전쟁중임에도 불구하고 수출입무역이 급증, 49년에 710만 달러이던 것이 52년 2660만 달러로 약 3.7배의 신장을 보였다(주로 텅스텐의 수출에 의한 것). 수입도 같은 기간중 약 5.8배나 증가했는데, 주로 6·25중에 양곡의 대량수입과 생산시설 복구를 위한 시설재 도입이 급증한 결과였다. 휴전협정 이후에는 수출입무역이 전반적으로 정체상태에 있었다. ② 개발촉진기(1962∼79):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경제개발 5 개년계획의 추진과 더불어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이 촉구됨에 따라 무역정책의 기조는 수출확대를 위한 기반조성에 두어졌다. 66년 대한무역진흥공사를 설립함으로써 해외시장 개척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67년 무역자유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GATT에 가입하였다. 70년대의 무역정책도 수출확대책으로 일관되었으나, 종래의 양적 수출정책에서 질적 수출진흥책으로 전환된 것이 특색이다. 제 3 차 5개년계획기간의 무역정책은 주로 수출산업의 기반확충과 원자재의 확보 및 해외시장 확대 등에 역점을 두었다. 제 4 차 5개년계획기간에는 중화학제품의 수출촉진을 위해 모든 시책이 동원되었다. 이 시기의 무역동향을 보면,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과 수출진흥정책 등에 힘입어 급속한 신장을 거듭하였으며, 만성적 무역역조도 점차 개선됨으로써 무역입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수출은 62년 5400만 달러에서 79년 150억 5000만 달러로 신장되었다. 수입도 62년 3억 9000만 달러에서 79년 203억 3800만 달러로 약 52배가 늘었다. 또한, 무역역조비도 66년 28:1에서 79년 약 1.4:1의 수준으로 개선되었다. 수출상품구조도 66년 공산품구성비 66.5%, 중화학공업제품구성비 10.2%에서 79년 88.9%, 38.8%에 달하였다. 또 62년에는 10여 개국에 불과하던 수출대상국(輸出對象國)이 79년에는 140여 개국으로 늘어났다. ③ 현황과 과제:한국의 수출은 1980년대에 들어서 제 2 차 석유위기로 인한 세계경기의 불황으로 신장률이 크게 둔화했으나, 82년 이후 국제금리인하와 유가하락에 의한 세계경기의 호전으로 83년부터 호조를 보였다. 85년에는 수출입이 다같이 위축되었는데 수입은 62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성장률을 기록했다. 86년에는 유가하락, 달러화의 약세, 국제금리의 인하 등 3저현상(三低現狀)으로 수출은 80년대 이후 최고의 증가율을 기록, 수입도 늘지 않아 무역수지는 사상 최초로 약 40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98년 수출 1323억 달러, 수입 932억 달러를 기록한 한국무역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첫째, 지역간 무역불균형의 축소, 둘째 최근 선진국의 수입규제에 대한 동일 이해국(利害國)과의 공동대처, 무역마찰의 방지를 위한 국제분업화의 추진, 셋째 국내 유치산업의 보호를 위한 수입관리정책의 수립, 넷째 고부가가치 상품의 개발 등 제도적 장치와 전략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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